치과의사 이한나

안녕하세요. 치과의사 이한나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의 핵심은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치료계획,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치료기법과 능숙한 솜씨, 환자의 아픔에 대한 깊은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꿈꿉니다.
위에 열거한 치료의 핵심을 보다 더 잘 소화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어느 누구도 ‘더 열심히 해’라고 하는 이가 없는데,
오히려 이제 조금은 쉬엄쉬엄 하라고들 하는데 저는 마냥 이 일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치료나 임상연구에 몰두하고 빠져있는 순간은 내가 아닌 나 같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먼저 시작한  종이인형 놀이
저는 유아기 때 걷는 것도 늦었고 말하는 것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늦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애가 이쁘다고 들었다 내렸다 많이 하더니, 애 머리가 이상하게 되어 말을 못하는 거 아니냐’고
까지 하셨대요. 말도 잘 못했던 저는 종이인형 놀이를 좋아하여 가위로 수많은 종이인형을 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손으로 하는 일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대학시절에 알게 되었어요.
모든 것에 늦되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손재주'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지요.
지금은 치과의사가 되었지만 저의 꿈은 의상디자이너였습니다.
중학교 때 린지 와그너 주연의 ‘사랑과 그림자’라는 TV미니시리즈를 보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인 ‘패션디자이너 멜라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미술반에서 매일 하루에 한 장의 그림을 그렸던 거 같아요. 덕분에 미술학원 한 번 간 적 없었지만 교내미술대회에선 거의 매번 입상을 했었고 학교대표로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저의 예술적 기질을 굳게 믿었고 그렇게 의상디자이너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해부실습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간 치과대학
고향인 부산에서 고3이 되었고 대학진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약대를 거부하고 서울대
의상학과를 가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런 과는 집에서 뒷바라지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단다.
그러니 다른 과를 알아보도록 하자.” 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 서럽고 아쉬웠습니다. 사실 아버지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의상학과’라는 것도 그렇고, 우선 서울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는데 돈이 많이 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의상학과를 포기하고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을 지원해서 운 좋게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의대가 아닌 치대를 지원한 이유는 사체해부실습이 너무 무서워서였는데요, 알고 보니 치대에서도
사체해부실습이 있지 뭐에요.^^
그렇게 저와 치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족한 가정환경이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성실함이었습니다.
아버지 직업이 택시기사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아버지 직업란을 채울 때마다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께 미안하고 죄송해서 그냥 눈물이 줄줄 납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제대로 교육을 받으셨으면 유명한 성악가가 되셨을 분입니다.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고 가곡을 부르면 정말 멋졌어요. 사실 제 생각엔 아버지랑 아버지의 직업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를 너무 좋아하시고 감성이 풍부하셔서 TV를 보다가도 곧잘 울곤 그러셨어요. 또한,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도 바로 ‘아버지’입니다. 넉넉하지 않았던 가정의 3남매 중 맏이였던 저는 더더욱 성실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동생들까지 공부시키기 버거우실 것 같아서, 대학 들어가자마자 과외를 시작했고 치과의사 국가고시 한 달 전까지 계속하였습니다.
부산대학교 발전기금 장학생 되다.
과외를 하면서 치과대학 공부를 하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땡시험’이라는 것이 있었고 중간, 기말고사 때에는 거의 일주일 정도는 밤샘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치과대학 커리큘럼이 적성에 맞았는지 입학할 때에는 받지 못했던 전액장학금을 본과에 진학한 후 받게 되었습니다. 본과 1학년 2학기때 수석을 했는데 운 좋게도 그때 수석인 학생에게 특별히 학교 발전기금 장학금이 수여되어 저는 졸업 때까지 전액장학생이었지요. 덕분에 부모님의 부담도 덜어드릴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입니다.
울산 교정치과에서의 봉직의 생활
졸업을 앞두고 졸업식을 하기도 전부터 취직을 했어요. 울산의 한 교정치과였습니다. 약 1년 가까이 원장님과 같이 진료를 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버지가 뇌혈관기형으로 인한 뇌출혈로 뇌수술을 받게 되었고 집안의 모든 책임은 맏딸인 제가 지게 되었지요. 소위 가장이 된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가족 전체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비장함으로 서울행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거침없이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에 오다.
책과 담요 2장을 차 뒷자석에 가득 실었습니다. 그리고 뇌수술 후 입원 중이던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서 병원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죠.
“엄마, 나 서울가. (울컥)”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먹임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지네요. 그 때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대학졸업반 때부터 운전을 하긴 했지만 고속도로는 처음 탔습니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갈 때에는 고속버스를 탔거든요. 중간에 주유를 위해 금강휴게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휴게소에 내리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부산에서 서울 도착 때까지 화장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거였어요. 너무 긴장했고,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더 생각하세요’
1995년 1월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일한 곳은 잠실 송파동 골목 안 치과였습니다.
당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 있을 때였어요. 하지만 저는 모래시계 본방을 한 번도 사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집이 없었으니까요. 치과 원장실 한 켠에서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눈이 정말 많이 왔어요. 부산 시골에서 올라와서 눈 구경을 하면 당연 좋아야 하는데 저는 마냥 슬프고 우울했어요. 창가에 앉아서 제법 굵게 내리는 함박눈을 보고 있으면 내 인생이 어디로 흐를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석촌호수에 풍덩 하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석촌호수에 가면 “한 번만 더 생각하세요”라는 팻말이 있습니다. 아마 저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이들이 그곳을 많이 찾았나봐요.
메뚜기 치과의사?
그리고 일년 후 신월동에 조그만 제 병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일년 반 정도 후에 다시 여의도로 치과를 옮겼어요. 돈도 없으면서 어려운 IMF시절에 치과를 옮겼어요. 손해를 많이 보면서. 이유는 한가지였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진료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치료방법을 적용해 보고 싶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치과 위생사가 찾아와서 귀띔을 해 주었어요. ‘원장님, 여의도에 가면 원장님께서 하고 싶은 새로운 치료를 하실 수 있을 거에요.” 라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 위생사의 말 한마디만 믿고 치과를 옮기는 결정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손해를 무릅쓰고 병원 이전을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영등포구 치과의사회에 등록하러 가서 총무님께 들은 말에 너무나 상처를 받았지요. “메뚜기 치과의사에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네? “하고 되물었습니다. 메뚜기 치과의사란 자기가 치료한 환자를 책임지기 싫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하는 치과의사를 말하는 것 이라네요. 억울한 마음에 “전 메뚜기 아닙니다. 다만 저를 알아주는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했어요. 결국 저는 지금 강남의 ‘하루에 치과’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검색창에 ‘치과의사 이한나’ 이렇게만 치면 제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 수가 있으니, 이제는 제가 도망가기 위해서 이사한다는 말은 더 이상 안 나오겠지요?
인생의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오다.
제가 우연히 선택해서 지금 치과의사가 된 것이 저의 첫 번째 인생의 기회였다면, 두 번째의 기회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1998년부터 임플란트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연수회를 통해서 임플란트를 배우고 임상에 적용하게 되면서 좀 더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20여 명의 연수회 의사 중에서 유일한 여자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임상 실적을 쌓은 덕분에 여러 치과대학 교수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터라, 그 교수님들께 배움을 부탁드릴 기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 임플란트 강연에서 우연하게 알게 된 최용창 교수님께 배우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임플란트를 심어서 당일에 보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는데, 교수님의 강의 아이템은 그와 관련된 것이었고 저는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교수님께서 가톨릭대학교에 계신 것을 알게 되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해 가톨릭대학교에서 임상치과대학 임플란트학과가 처음으로 생기면서 20대 1의 경쟁을 뚫고 입학하게 되었고, 드디어 제가 간절히 원하던 최교수님께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 임상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그 시절에 밤을 새가며 공부하던 것들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강의 전에 밤새 관련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러 갔습니다. 미리 예습을 해야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알 수 있었고, 모르는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여 명쾌한 해답을 얻었을 때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내 맘에 드는 치아 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쁜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특히 예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왜 예쁜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예쁜 사람을 보면서 그런 생각에 잠긴 적이 많습니다. 제가 치과대학에서 교육받은 내용의 대부분, 그리고 실제 임상에서 적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치료법들은 질병을 해결하고 원래의 형태로 회복하는 수준의 치료였습니다. 그런데 실제 환자들의 치아를 위해 기공소에서 만들어오는 치아의 형태는 저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02년(논현동 병원을 연 그 해)부터 제가 치아모양을 직접 왁스로 작업을 한 후 그 모양을 복제해서 치아모양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하지만 저는 치아모양이 특히 중요한 앞니(눈에 보이는 위아래 총 20개의 치아)치료를 할 때에는 왁스작업을 꼭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석고모형에 왁스를 올렸지요. 왁스를 올리고 또 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치아의 형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개개인마다 타고나는 얼굴모양이 다르듯 치아의 모양도 그러한데 보다 더 아름다운 치아모양의 기준을 알게 된 것이지요. 치아도 비율적으로 황금비율 즉, 다빈치비율에 가깝게 디자인되어야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치아디자인의 이름을 “다빈치”라고 명명했고 다빈치치아성형 아틀라스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2006년)
신이 준비했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렇게 수없이 많은 앞니 치료를 손수 하다 보니 환자가 보다 더 만족할 수 있는 심미치료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고, 점점 더 얼굴과 조화를 이루는 치아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치료 후 시술사진들을 분석하다 보면 아쉬운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했습니다. 그런 일들의 반복이 보다 더 많은 앞니치료에 대한 경험으로 쌓이게 되었고 이제는 환자가 이야기 하기 전에 전체적인 치료방향이 쭉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2007년부터 도입된 CAD/CAM 시스템인 ‘세렉’인데요. 세렉이라는 장비만 있다고 좋은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운 좋게도 저는 이미 세렉이라는 장비를 활용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던 거죠. 2002년부터 왁스작업으로 치아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어 있었고, 더욱이 2005년 이후로는 치아를 직접 만드는 기공 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렉이라는 장비를 200% 활용하려면 치과의사와 치기공사가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이미 저는 한 몸이 되어 있었던 셈이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는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한 꼴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준비해 주신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삭제 라미네이트 치료를 개발하다.
2007년말부터 도입된 세렉이라는 장비는 단순히 하루만에 치료를 완성할 수 있다는 장점
이외에 다른 선물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세렉이라는 장비를 구입하고 회사에서 가르쳐 주는
매뉴얼대로 치료를 시작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리 간단하거나 또는 편리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렉과
친해지려고 약 3개월 정도 고생을 한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밤새 기계를 돌리고 또 돌리고 하다가 집에 가지 않고 치과 체어에 누워 잠든 날도 있었지요. 아침에 직원들이 출근해서 깜짝 놀랬던 날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것이 있어요. 세렉을 이용해서 이전의 방법에 비해 보다 더 작은 치아삭제로 예쁜 라미네이트 제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서 특허출원도 했습니다. 이전의 치아미용치료에 있어서의 한계가 아름다움을 위해서 치아손상을 감수해야 했던 부분이 있었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치아건강과 치아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이때부터 최소삭제 라미네이트 치료를 적용하기 위해서 돌출이나 불규칙이 심한 경우에는 사전의 간단한 치아교정(약 2-4개월 간단교정)을 시행하는 방법이 폭넓게 적용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간단교정문의가 참 많은데요. 사실 간단교정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라미네이트 치료를 보다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응용이 자유롭다.
이제는 제가 저희 병원에서 저와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을 가르칩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의사를 고용하는 것이 아닌, 보다 더 좋은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의사들을 발굴하고 지도하고 뒷받침을 하고 싶습니다. 저도 좋은 선생님께 배워서 보다 폭넓게 보고 창의적으로 진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제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학교에서 배우는 기본적인 지식만으로는 완성된 임상 진료를 하기가 힘듭니다. 수많은 경험이 바탕이 되고 그 경험 속에서 더 나은 결론들이 정립되면서 보다 수준 높은 치료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의사들에게 얄팍한 테크닉만을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금세 변하기 마련이거든요. 충분히 응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치료에 대한 기본원리와 미적인 부분에서도 남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뛰어난 안목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미용치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노력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아시아 일등 미용치과병원이 되리라.
가끔 생각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가? 그리고 왜 이렇게 일하고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배도 고프지 않은가?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워커홀릭’이라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상 제가 일을 하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다면 저는 절대 억지로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는 가속도가 붙어서 멈출 만한 때도 아닙니다. 제가 처음으로 내 차를 운전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운전 연수도 받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저에게 운전석에 타라고 하셨고 당신께서는 조수석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악셀레이터를 밟으면 앞으로 가면서 속도가 난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는 서는 거야.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는 악셀레이터를 맘껏 밟아도 돼.” 이 말은 항상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뭔가에 미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저는 가속 중이고 언제든 제가 원할 때 멈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시아 일등, 세계 일등이 될 것입니다. 저와 같이 하는 의사선생님들과 함께요. 한국의 치과의사가 세계에서 가장 실력 있는 치과의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